4. 통일신학의 실천적 제안
1) 요셉의 실천신학
통일에 있어서 가져야할 우리의 자세인 형제애의 회복을 생각하면 용서와 포용이다. 용서의 한 예로 우리는 성경에서 요셉을 떠올릴 수 있다. 12명의 자식들 중에서 편애를 받으며 응석받이로 자란 요셉의 반전된 인생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다른 어느 인물보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2-3)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죽을 때는 사라를 장사하기 위하여 산 마므레 앞 헷족속 에브론의 밭 막벨라 밭만 소유하게 된다(창 23장). 한 사람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가나안 땅에서는 아브라함을 거쳐 이삭, 야곱을 지나기까지 하나님이 번창시키지 않으신다. 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고난의 인생을 겪게 하심은 한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다. 바로 ‘민족’ 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샘플로 보여주기 위해 택함 받은 이스라엘 민족, 그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기 위해 요셉이 쓰임 받은 것이다. 요셉이 없었더라면 기근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살던 야곱의 식구들은 모두 아사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시고 야곱의 식구들을 가나안 땅에서 불러들여 애굽의 고센 땅에서 구별되어 애굽 민족과 섞이지 않게 하시며 번성하게 하신 것이다.
필자가 성경에서 요셉을 통일신학의 실천적 제안으로 삼은 것은 그의 꿈(비전)도 아니고, 애굽의 국무총리 높은 자리도 아니다.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었다. 형들에게서 구덩이에 버림을 받게 되는 일,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 가는 일, 억울한 일을 당해 감옥에 들어가는 일, 감옥에서 조차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잊어버린 일 등등 그의 인생에서 억울하고 화가 나고 이해되지 않는 많은 일들을 겪어내면서도 그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요셉을 용서의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요셉의 상황에서 자기를 억울하게 감옥으로 몰아넣은 보디발의 아내를 벌할 수도 있었고, 은혜를 잊어버린 떡 맡은 관원장을 괘씸죄로 벌할 수도 있었다. 또한 자기를 우물에 처넣고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의 죄를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오히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5-8a)라고 하였다.
원수사랑에서 요구되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는 사랑의 용서이다. 한나 아렌트는 “환원 불가능한 과거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치유능력을 인간의 용서의 행위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용서란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도 과거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요, 인간의 증오와 악의 사슬을 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란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화해의 행동이다. 이것은 분단된 세계 그 중심에서 일어하는 선포의 행위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교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다.[박정수, “성서적 통일신학: 통일선교신학을 제안하며”, 『신학과 선교』, 제 41집(부천: 서울신학대학교 한국기독교통일연구소, 2012), 237-238. 재인용) 이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요셉의 정신 즉, 사랑의 용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