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시합에서 이기려면 연습을 충실하게 잘하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남북한이 어울려서 행복하게 살려면 통일을 미리 잘 연습해야만 합니다.”
이민교(50·러빙터치 대표) 선교사. 그가 주창하는 통일은 거창한 게 아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금세 ‘나도 통일할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든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이름 하여 통일연습 다섯 가지. 첫째, 통일금식. 매월 1일을 통일을 생각하며 금식하는 날로 삼자는 것. 둘째, 통일예배. 한 달에 한 번, 매월 첫 수요일은 통일예배로 드리자는 것. 셋째, 통일성경 보급. ‘시편’만이라도 순수 북한말로 된 성경을 보급하자는 것. 넷째, 통일저금통. 통일저금통을 채워가며 통일을 향한 꿈도 키워갈 수 있다는 것. 다섯째, 통일선교사 파송. 각 영역에서 통일을 실천할 사람들을 세우고 파송하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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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을 위해 말하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온몸으로 통일을 실천할 때라고 말하는 이민교 선교사.
ⓒ유코리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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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반드시 이뤄진다’ 이런 예언적인 목소리, 필요합니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자’ 광장에서든 골방에서든 통일을 위한 기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통일을 행동하고 쟁취하는 것입니다.”
이 선교사가 처음으로 이 다섯 가지 통일연습을 공표한 자리는 지난 2월 통일비전캠프였다. 강의가 끝난 뒤 사람들의 인사말은 대체로 이랬다. “행동하는 통일이군요.” 지금까지 통일은 기도하는 통일, 세미나 하는 통일, 아니면 개별 단체가 실천하는 통일에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범 교회 차원의 실천적인 통일을 제시하는 통일은 그만큼 드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허문영(평화한국 대표) 박사의 요청으로 이 선교사는 평화한국 1호 통일선교사가 됐다. 설날 세배를 갔던 조동진(민족통일에스라운동협의회 명예이사장) 박사로부터는 “이 선교사가 하는 통일운동의 방향이 맞아. 나는 김일성 세대에 통일운동을 했지만 이제 김정은 세대에 맞는 젊은 통일운동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롬의 황성주 박사는 “기도하면서 마지막까지 숨겨놨던 이름”이라며 ‘러빙 터치’(Loving Touch)란 NGO 타이틀을 주며 북한의 장애인 돕기 사역을 하도록 배려했다. 지난 4월엔 하와이 열방대학에서 열린 뉴코리아서번트리더십 세미나에 참석해 5가지 통일연습을 국제무대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통일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 정작 이 선교사 본인은 “나는 통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저 통일에 대해 배우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 선교사를 만난 건 지난 6월 24~26일까지 열렸던 춘천 통일코리아 컨퍼런스 현장인 춘천제일장로교회에서였다. 그는 “통일을 배우느라 통일 관련 세미나나 컨퍼런스는 되도록 빼먹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통일비전캠프에서는 물론 쥬빌리 기도회, 통일환경정책포럼 등 여러 곳에서 그와 마주쳤던 것 같다. 그 모든 게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기 위해서였다니.
이 선교사가 북한 사역 내지는 통일을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지난해 9월이다. 그 전에는 GP선교회 소속으로 국내는 물론 중앙아시아에서 장애인 사역, 이슬람 선교를 해왔다. 두 가지를 다 병행하면서 장애인 축구단도 만들게 됐다. 1997년부터 우즈베키스탄 농아교회 목사로 섬겼고, 카자흐스탄 농아축구팀 국가대표 감독도 맡고 있다. 이들을 이끌고 장애인 아시안게임, 올림픽에도 네 번이나 나갔다. 단순한 복음전도를 뛰어넘은 사역이었다. 그렇다보니 국내 언론에서 그를 ‘한국을 빛낸 인물’이라며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고, 청와대에도 초청돼 간 적도 있다. 유명세를 타다보니 선교 현장보다는 국내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잠수를 결정했고, 이후 수년간 그의 이름 석 자는 언론에 일체 등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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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교 선교사 |
원래 중동 사역은 중국인들이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도 중동과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백 투 예루살렘’이 오래 전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것도 그런 이유라고 봤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곧바로 중동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문화와 이념(사회주의)이 같은 중앙아시아를 거치는 게 더 전략적이라고 여겼다. 그가 중앙아시아 사역에 주력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크리스천들이 중앙아시아로 건너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었다. 곰곰이 원인을 캐묻다가 중국 대륙 귀퉁이의 작은 나라 남북한이 막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분단 장벽을 뚫어야지만 예루살렘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 회복을 위해서는 남북 통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통일, 북한사역 이런 단어들은 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제 의식 속에 한반도는 허리가 잘려버린 장애인 국가라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한 쪽은 춥고 배고프고 어둡고, 다른 한 쪽은 흥청망청 쓰고 버리고 타락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거죠. 제 마음도 아팠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헌신이라고까진 할 것 없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다. 국제적이면서도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의미들이 중첩된 장이다. 냉전 끝 무렵 열린 1988년 서울올림픽이 동서 화해의 상징이 된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그가 2028년(혹은 2032년) 평양올림픽을 꿈꾸는 이유다. “대륙별 쿼터제에 따라 거의 20년마다 한 번씩 아시아가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어 있습니다. 1964년 동경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었는데 2028년 평양올림픽이 열린다면 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도 굉장히 관심을 많이 기울일 것 같아요. 이것을 위해 우선 북한 장애인축구팀을 만들고 이를 통해 남북 장애인 체육 교류의 물꼬를 트고 싶습니다. 저는 비록 통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지금 상태로 통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 같아요. 빈부 격차도 너무 심하고 자연스럽게 통일한국은 일등 이등 국민으로 나눠지는 불행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거든요.”
그는 체육교류야말로 지금의 경색된 남북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히든카드라고 했다. 얼마 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구호가 있었다. ‘체육 생활화 체육 대중화’라는 내용이었다. 북한에 국제 유소년 축구클럽이 생겼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북한에 체육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걸 직감했던 것이다. 축구 물품을 북한에 지원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국내외 체육 관계자들을 총동원해 남북 체육 교류의 새 장을 열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당장 올 가을에는 브라질을 방문해 축구 관계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머리보다는 몸으로 통일을 하다보니 그는 바쁘다. 얼마 전 한 절을 방문했을 때는 몰래 우물에 던져넣은 동전들을 모조리 건져서 통일저금통에 넣은 적도 있다. 할 수 있다면 전국의 사찰이나 성당을 다니며 우물이나 성모 마리아상 아래 던져놓은 동전들을 긁어모으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목적은 단 하나. 그 돈으로 북한에 있는 장애인, 고아들을 먹이고 그들을 대상으로 축구팀을 만들기 위해서다. 통일저금통 얘기를 듣고 소록도 나병환자들도 선뜻 모금에 나서고 있다. 그는 80년대 중반 원불교 승려로서 소록도 나병환자들을 포교하러 갔다가 도리어 그들로부터 복음을 듣게 됐다. 이후 그들은 이 선교사의 둘도 없는 중보기도자이자 후원자들이 됐다.
“통일을 위해 나설 때 제가 받은 말씀은 누가복음 12장에 있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는 거였어요. 통일을 위한 불, 그래서 제가 가는 곳마다 통일을 불 지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였죠. 통일의 불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