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통일 신학의 과제
1) 한국교회의 이데올로성 극복
한국 교회는 형제애의 회복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남북 이념 논쟁에 오히려 더 불을 지피고 있다. 다음은 오래전 서울 **교회에서 열렸던 ‘북한 동족과 탈북자들을 위한 서울 통곡대기도회’에서 있었던 발언이다.
북한정권은 사이비종교와 같다…동포들이 굶어죽는데 관광을 다닙니까라고 묻길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다시 반문했다. 그랬더니 그 탈북자가 밀고 올라가야지요. 그래야 우리가 총을 뒤로 돌릴 것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하더라…북한 동포를 도와야지, 정권에 돈을 갖다 줘서는 안 된다. 평균적인 지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다 아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은 곧 사탄과 싸우는 것이며 적그리스도이다… 남한에서 친공 반미세력을 모두 없애주시고, 김정일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김** 목사의 발언, 「복음과상황」제180호에서 인용)
이런 인식은 김** 목사뿐만 아니라 대다수 보수 기독교인들의 의식이기도 하다. 이 집회에는 한기총 임원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교계 원로들이 모였다. 이들은 북한 정권과 북한 동포를 구분한다. 북한 동포는 도와야 하지만 북한 정권은 박멸해야 할 사탄의 무리들로 규정한다. 그러나 현 북한 체제를 국민과 정부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은 허상이다. 북한은 안으로는 주체사상과 밖으로는 반미 의식으로 공고하게 하나로 뭉친 집단이다. 또 설사 북한 동포와 정권을 구분한다 할지라도 정권에 의해서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데 이를 각각 취급하겠다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 인식이다. 북한에 대한 인식이 이런 이상 통일은 오로지 흡수통일이나 전쟁에 의한 통일밖에 없다.
또한 북한 정권을 변하지 않는 사탄의 무리로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북한도 변하고 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라는 공식 기독교 단체가 있고, 스스로 북한 내에 1만 2천 명의 신자와 2개의 공식 교회, 520개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오픈도어즈'는, 비록 신뢰성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북한 내에 540개의 지하교회가 있고, 약 50만의 교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용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가 있지만 현상적으로 북한의 종교에 대한 태도가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과격한 유물론적 비판에서 한발 물러나 종교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종교탄압이 여전하지만 북한을 사탄의 정권으로 규정하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너무도 소중한 말씀이기에 예수님은 3번이나 반복적인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웃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사탄으로 볼 것인가, 잃어버린 자로 볼 것인가. 결국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사람도 바뀌고 정권도 바뀌고 이념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한국교회는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태도를 유연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최근에 북한의 조선 그리스도인 연맹 소속의 목사들이 참여한 세계교회 34개국 출신의 교회지도자들이 스위스의 제네바 인근에 모여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진전시킬 방안을 모색했다.(「기독교신문 베리타스(The Veritas)」2014년 6월 23일 )
사실 한국교회의 반북의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되었다. 남한의 기독교는 그 뿌리가 반공주의이다. 남한 기독교의 주류는 북한의 서북세력(평안도와 황해도)이다. 해방 전후 조선의 기독교인은 장로교인이 전체 기독교인의 3/4쯤 되었는데, 장로교의 60%를 서북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해방직후 공산주의와의 갈등과 또 토지개혁 문제 때문에 월남한 기독교인이 많았는데, 그 수가 무려 7-8만 명(전 통일부 장관 강인덕의 주장)이나 되었다. 이는 당시 북한 기독교인 20만 명의 35-40%에 달하는 숫자였다. 이들이 남한에 정착하면서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한 것이다. 이들은 공산주의 치하에서 핍박을 받았던 체험적 반공주의자들이었다. 6 ․ 25 전쟁을 계기로 이런 확신은 더 굳어졌다. 1953년 6월 15일, NCCK 주최로 부산 충무로에서 열렸던 통일구국 기원 신도대회에는 1만 명이 참가했는데 그 때의 주요 발언은 다음과 같다.
한국정부와 한국국민은 일치하여 최근 판문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휴전안에 대하여 한사코 반대한다. 한국 통일은 공산주의와의 유화에서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굴복시킴으로써 성취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설복할 수 없는 마귀, 영구히 회개할 수 없는 마귀다.
이런 과거를 뒤돌아본다면 현재 보수 기독교인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벌이고 있는 반북 반공 기도회와 북한인권한국교회연합 통독기도회가 이해될 만도 하다. 상대방의 잘못을 들추기 시작하면 더 이상 형제간의 화해는 일어날 수 없다. 상대방만의 잘못이 아닌 우리의 잘못도 있다. 이제는 덮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 미래와 후손들을 위해서도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어야만 한다. 6.25 전쟁세대들이 가고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주류의 위치에 선다는 것은 어쩌면 희망일 수 있다.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상처 때문에 화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분단과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념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다는 데 있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극단의 흑백논리로 양분되면서 편가르기로 나간다. 정의나 윤리보다는 어느 편이냐가 중요하게 되었다. 자기편이면 불의도 용서되었다. 교회가 자기 개혁의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분단이 만들어 놓은 윤리적 무감각성 때문이다. 사랑이나 용서나 모든 성경의 윤리들은 이데올로기적 대립 앞에서 무력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이제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읽어야 할 성경은 갈멜산 상의 엘리야와 바알 우상과의 투쟁 부분만이 아니라 산상수훈에 나타난 원수의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도 살아야 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받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이 시대에 한국교회가 실천해야 할 주님의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남한과 북한에 갈라지고 찢긴 심령을 교회가 위로하고 싸매주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할 것인가? 교회는 보수 세력의 첨병이 되기보다는 남북한의 형제애의 회복에 앞장서고 이를 위해서 모든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목적은 체제 경쟁이나 단일 민족 국가의 수립이 아니다. 형제애의 회복이며 북한 교회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차적으로 성경에서의 통일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한국교회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