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꿈 속에 사막의 신기루처럼 머물러 있었던 실크로드 육로 대장정에 나섰다.
늘 그런 여행을 한번 해 보리라 마음 먹었건만, 현실의 묶임은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한 두번쯤은 그런 기회가 오게 된다.
인생의 달음박질을 잠시 멈추고, 잠시 숨을 돌리며 호흡을 가다듬는 그런 시간이 오기 마련이다.
누가 함께 가며, 어떤 스케쥴과 경로로 이 여행이 진행될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 북경으로 향했다. 한국인과 중국인, 조선족과 그리고 얼굴빛도 새로운 중앙아시아 민족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채 통성명도 하기 전에 함께 북경 서역에서 밤 기차에 올랐다.
북경 집결지에서 떠나기 직전, 이번 여행은 비텍스트(non-text)로 진행한다는 선언이 있었다. 우리가 지닌 모든 텍스트를 내려놓고 떠나라는 것이었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을 준비하며 도움이 될만한 많은 책자와 자료들을 사 모았다.
여행 과정을 텍스트로 담기 위해 방송용 CCD카메라까지 빌려서 떠났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두고 떠나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성경조차 두고 떠나라고 했다.
지난 20여년간 한번도 내 손을 떠나 본 일이 없는, 평양을 오가면서도 항상 들고다니던 그 성경이었다. 갑자기 당황스러움과 걱정이 밀려왔다.
그런데 내 안에서 세미한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네 안에는 얼마나 내 말씀이 살아있느냐?
베이징과 시안과 란조우와 우르무치를 거쳐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오는 동안 우리는 오직 텍스트 밖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만 받았다. 텍스트를 의지했다면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간섭을 체험했다.
모래바람과 눈보라가 교차하는 타클라마칸 광야를 35시간동안 달리며, 마치 관 속에 들어누은 듯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침대 버스 안에서, 그동안 내가 의지하고 살아왔던 모든 습관과 제도와 관념과 틀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평소라면 도저히 손도 댈 수 없을 것 같았던 비 위생적인 모슬렘 식당에 들어가 너무나 맛있게 그들의 음식을 나누고 우리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그들만의 예배에 참석해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그 속에서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전통과 선입견과 판단의 벽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산족 마을에서 어린양을 직접 잡아 피흘려 죽이는 장면 앞에 나의 죄의 실상을 깨우친 후, 그 양고기로 풍성한 만찬을 베풀기도 했다.
어둠에 싸인 눈길의 천산산맥을 넘어 30시간만에 카작스탄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지키고 있는 군사들을 바라보며 깨달음이 몰려왔다. 모든 민족과 국가와 언어의 경계는 죄의 소산이다. 단순한 국가적 경계를 수호하는 저 군사들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의 군사들도 우리가 넘어가지 못하도록 철통같은 경계를 서고 있음을 알게된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의 생명이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넘어가는 행위 자체가 막힌 담을 허무는 첫 작업인 것을 깨닫는다.
지난 세월 중국에서 16년 사는 동안 무수하게 경계를 넘어 다녔지만 그것은 모두 동쪽 경계였다. 마침내 서쪽의 경계를 넘어 카작스탄의 땅을 밟을 때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오랜 세월 텍스트에 사로잡혀 살아온 나에게 광야 체험은 비 텍스트가 지닌 유익을 알게 하였다. 카작 땅에서 일하시는 많은 분들을 만나며, 그들이 지닌 텍스트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부분들이 이제는 내 안에 투영되어 나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텍스트에서 비텍스트로... 디지탈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우리가 얼마나 오리지날 소스에서 벗어나 상품화되고 제도화된 세컨더리 소스(secondary source)에 의지하여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상풍화되고 제도화된 것들은 반드시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대상에만 적용되는 제한성을 지니게 된다.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곳에서는 전혀 무용지물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오리지날 소스이다. 그리고 그분의 관심은 항상 오리지날 소스를 필요로하는 오리지날 소스가 통용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그들이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요, 집나간 둘째 아들이며... 우리가 찾아 나서야할 사람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제도권 밖에서 소외당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장애인들과 죄인들을 향해 직접 나아가셨다. 벙어리와 장님과 문둥병자와 절뚝발이의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카작스탄에서 농아인 공동체를 운영하는 귀한 목사님 부부와 동역자들이 살고 있는 현장을 방문했다. 그들을 섬기고 먹이느라 부지런히 콩나물과 두부를 팔고 함께 축구하며 뒹굴고 살아가는 그분들의 풋풋한 인정과 사랑을 접하고 나니, 잊고 살았던 비텍스트 속의 예수님의 얼굴을 다시 대면하는 기쁨이 넘쳤다.
우리가 자신만의 틀과 제도와 전통과 가치기준을 고집하고 있는 한,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설 수 없다. 우리가 다가가기 힘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들의 환경과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오리지날 사랑이 흘러갈 수 있도록 구조조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광야를 통과하면서 내가 들었던 소리 없는 손짓사랑의 함성이었다.
(연변과기대 정진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