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침례)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가지 규정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너무도 구체적으로 음식에 대한 규정들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먹고, 이것들은 먹지 말고 등등
또 의식에 대해서도 성전에 들어갈 때 양을 잡고 비둘기를 잡아서 번제단에 피를 어떻게 뿌리고, 물두멍에서는 손을 씻고, 등잔에서는 불똥을 따 주고, 떡상으로 가서 떡을 일주일마다 바꿔 놓고, 향로에다가 향을 꽂아서 향내가 많이 나게 하고 등등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음식에 관한 것, 모든 의식에 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구약의 복잡한 음식의 규례와 의식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기 때문에 이런 의식들은 실상이신 예수가 오시자 자연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음식과 의식에 대한 규례들을 다 폐해 버리시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음식과 의식에 대한 한가지씩의 규례들을 유언의 명령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음식에 관한 것이 성만찬(예수가 내 안에) / 의식에 관한 것이 세례(내가 예수 안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완성시키려고 하면 누구든지 세례를 받게 했고, 누구든지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보통 세례라고 하는 것을 성경 원어에는 침례(밥티스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머리위에 물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 세례라고 생각하지만, 세례를 그대로 번역하면 물에 가서 푹 <잠겨 버린다> immerse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원래의 의미에서 멀어진 세례로 바뀌었는가 하는 것은 실제로 카톨릭의 역사를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침례를 받으려고 물 속에 들어가게 되자 병약자와 노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노인이나, 병든자가 침례받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가다가 만약 불상사가 생기면 물 속에 넣는 사람이 살인을 하는 것이 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는 아주 건전한 뜻에서 카톨릭에서는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회의를 거듭한 결과 머리 위에다 물을 바르면 물 속으로 다 들어간 것이 되니 약식으로 하고자 결정하고 머리 위에 물을 발라 주기 시작했습니다.
약식의 세례를 하기 위해 시작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 때 유아 침례를 주는 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유아는 스스로 신앙 고백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유아 침례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하는 것은 오늘날도 기독교 교파 간에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아무튼 태어나 얼마 안 된 아기를 물 속에 넣으면 이상의 사건과 똑같은 현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갓난 아기 머리 위에도 물방울을 떨어뜨려 유아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이제 죽기 직전의 사람들, 병악한 사람들, 갓난 아기들은 물에 다 넣지 않고 물을 뿌려 줌으로써 세례의 의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이기에 교황도, 신부도, 수녀도 모두가 침례를 받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권위의 상징인 성직의 옷을 벗고 성직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게 권위가 떨어진다는 이유와 물이 많지 않은 곳에서는 그러면 예수님의 명령을 안 따를 수 없지 않느냐는 이유를 붙여, 그대로 머리위에 찍어 바르는 방법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완전히 침례를 없애 버리고 전부가 세례를 받도록 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따르며 성서대로 신앙을 갖고자 시작한 개신교는 아직도 세례와 침례의 논란 속에 교파가 나눠지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침례의 기원은 언제부터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온 것이 침례의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0:1~2)
침례의 첫 번째 의미는 과거와 모든 인연을 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400여 년 동안 고센 땅에서 이집트의 문화를 누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 홍해를 건너서자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딱 붙음으로 되돌아갈 길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를 완전히 청산해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처음 시작된 침례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침례의 두 번째 의미는 요한이 준 침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름 자체가 침례 요한입니다. 요한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느냐 하면 예수를 소개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도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네가 사람들을 물에다 잠궈 침례를 줄 때에 그 사람이 발견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람들에게 계속 침례를 주며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를 물 속에 잠궜다 일으키니 별안간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침례 요한은 발견할 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예수에게 준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침례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크시니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했는데,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은 성령받으면 예수를 증거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하신 지상명령 / 최고의 명령은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주신 이 명령은 우리의 삶에 영원한 영적경험 / 예수님과의 연합이 되어야만 합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절정에 이른 계명이요, 예수님의 절정에 이른 명령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 속에 넣었다가 꺼낸다는 것, 사람의 눈에는 시시하고 약해 보이고 유치해 보여도 하나님만은 그 일을 중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만큼의 비중과 똑같은 비중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6:3)
물 속에 그 이름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고난 당하심과 그대로 연결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 방법에 순종함으로 과거를 장사지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자가 되겠다고 하는 아주 절대적인 의식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는 내가 예수 안에서의 삶의 시작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