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의
농아축구단.
감독의 고함,
심판의 휘슬 대신
손짓만이 통한다.
소외되기 쉬운
장애인들이지만
공을 차며 함께 사는
법을 배워나간다.
선교를 위해 멀고
먼땅으로 건너간
한국인 이민교 목사가
이들을 이끈다.
"축구는 농아인들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같은 운동입니다. 함께 뛰고 어울리는 재미가 매력적이지만 서로 말하고 들을 수 없으니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멀기만 한 땅,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는 이민교(40)목사는 세계 유일의 농아인 프로축구단의 감독 겸 구단주다. 이목사가 이끄는 축구단은 사랑이란 의미를 가진 '세빈치'팀. 창단 3년째로 우즈베키스탄 프로축구 2부 리그에 속해 있다.
이 팀의 선수 28명은 모두 말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낮에는 식당이나 옷집의 종업원, 아이스크림 판매원 등으로 일하고 저녁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달려와 불을 밝히고 공을 찬다.
초·중학교 시절 학교 축구선수로 뛴 경험이 있는 이목사가 한국에서 들여온 책과 비디오 테이프 등을 보면서 먼저 익힌 뒤 선수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연습한다.
작전 지시는 손짓만으로 해야 한다.그나마 그 지시를 선수가 쳐다 보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고 만다. 심판이 휘슬을 불어도 선수들은 무작정 내달리기 일쑤다. 공만 보고 같은 편 선수끼리 달려가면서도 소리를 지르지 못해 결국엔 부딪쳐 피투성이가 된 적도 많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강하다. 경기 수당이 한푼도 없지만 선수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생업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본 경기는 물론 연습에도 빠짐없이 나와 구슬땀을 흘린다. 입과 귀가 막힌 대신 집중력이 좋고 눈썰미가 뛰어나 한번 알려준 것은 금방 따라한다.
세빈치팀의 실력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축구팀 수준.지난해에는 프로 2부 22개팀 중 18위를 차지했다.
2000년 10월 대만에서 열린 장애인 아시안게임 때는 참가 18개국 중 3위에 올랐다. 당시 돈이 없어 왕복 비행기표만 끊어 출전했다. 호텔에서 묵던 다른 팀들과 달리 10여일 동안 경기장 라커룸에서 잠자고 컵라면과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래며 올린 값진 결과였다.
"상처받고 소외되기 쉬운 장애인들에게 축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줍니다. 또 서로 손발을 맞추며 뛰다보면 더불어 사는 삶의 이치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됩니다."
타슈켄트에 사는 장애인들은 세빈치팀의 시합이 있는 날이면 경기장으로 대거 몰려 온다. 말 대신 깃발을 흔들고 열광적인 손짓으로 응원하다 보면 그라운드의 장애인 선수들과 자연스럽게 한 마음이 된다. 경기에서 아깝게 진 날은 운동장에서 선수·응원단이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쏟기도 한다.
축구는 그동안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던 장애인들이 마음을 열고 바깥 세상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농아인들은 봉사단체를 만들어 자신들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시각장애인을 한달에 한번씩 방문, 이발·세탁을 해주는 한편 장례식 등을 찾아가 돕고 있다. 노인들만 사는 집에 가 힘든 농사일을 거들기도 한다.
프 로축구 팀을 운영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기숙사는 물론 전용버스마저 없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선수들은 각자의 집과 일터에서 버스·지하철을 타고 경기장으로 나온다.
이목사는 "경기에서 승리한 날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지만 게임을 진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처량하다"며 "25인승 버스 하나를 구입해 선수들이 단체로 경기장을 오갈 수 있게 해주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목사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간 것은 1997년 3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젊었을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보자"며 전주에서 약국을 하던 부인(이미라·36)과 딸(하늘·4)·아들(영광·2)을 이끌고 비행기를 탔다. 집을 사기당해 거리에 내몰릴 위기를 겪기도 하고 애써 구입한 중고차를 이틀 만에 도난당하는 등 갖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타슈켄트에 장애인교회를 세워 목사로 활동하면서 30여만명에 이르는 농아인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이슬람 국가인 이 나라에서 장애인들은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들'로 취급당하고 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들을 위해 수화 책을 만들어 보급 중이다. 또 자립·자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남자들에게 판금·도색을, 여자들에게는 미용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취업을 알선하고 있다.
"왜 먼 남의 나라까지 와 굳이 장애인을 챙기느냐"고 주변의 오해도 많이 받는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이라는 말로 설명을 대신하곤 한다.
원광대 물리학과 재학 시절 수화동아리인 '손짓 사랑회'를 만들기도 한 이목사는 어릴 때부터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전북 남원시내에 있던 고향 집 근처에 고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살던 농아·지체장애아 등과 어울리면서 '왜 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이유로 나는 다리가 있을까'같은 물음을 내 자신에게 던지곤 했었지요." 고등학생 시절에는 집안의 어른들을 따라 소록도를 방문하고는 "여기야말로 나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실제로 대학을 졸업한 뒤 소록도에 들어가 2년 동안 머물며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당시 사람들이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어 주지 않자 "나를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여겨 차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다시 완전히 자라는 데 6개월씩 걸리는 눈썹을 세차례나 깎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 안식 휴가를 받아 식구들을 데리고 전주를 찾은 이목사는 "이번 월드컵 축구 때 우즈베키스탄의 농아 축구선수들을 데려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멋진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장대석·사진=양광삼 기자
농아축구단.
감독의 고함,
심판의 휘슬 대신
손짓만이 통한다.
소외되기 쉬운
장애인들이지만
공을 차며 함께 사는
법을 배워나간다.
선교를 위해 멀고
먼땅으로 건너간
한국인 이민교 목사가
이들을 이끈다.
"축구는 농아인들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같은 운동입니다. 함께 뛰고 어울리는 재미가 매력적이지만 서로 말하고 들을 수 없으니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멀기만 한 땅,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는 이민교(40)목사는 세계 유일의 농아인 프로축구단의 감독 겸 구단주다. 이목사가 이끄는 축구단은 사랑이란 의미를 가진 '세빈치'팀. 창단 3년째로 우즈베키스탄 프로축구 2부 리그에 속해 있다.
이 팀의 선수 28명은 모두 말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낮에는 식당이나 옷집의 종업원, 아이스크림 판매원 등으로 일하고 저녁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달려와 불을 밝히고 공을 찬다.
초·중학교 시절 학교 축구선수로 뛴 경험이 있는 이목사가 한국에서 들여온 책과 비디오 테이프 등을 보면서 먼저 익힌 뒤 선수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연습한다.
작전 지시는 손짓만으로 해야 한다.그나마 그 지시를 선수가 쳐다 보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고 만다. 심판이 휘슬을 불어도 선수들은 무작정 내달리기 일쑤다. 공만 보고 같은 편 선수끼리 달려가면서도 소리를 지르지 못해 결국엔 부딪쳐 피투성이가 된 적도 많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강하다. 경기 수당이 한푼도 없지만 선수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생업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본 경기는 물론 연습에도 빠짐없이 나와 구슬땀을 흘린다. 입과 귀가 막힌 대신 집중력이 좋고 눈썰미가 뛰어나 한번 알려준 것은 금방 따라한다.
세빈치팀의 실력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축구팀 수준.지난해에는 프로 2부 22개팀 중 18위를 차지했다.
2000년 10월 대만에서 열린 장애인 아시안게임 때는 참가 18개국 중 3위에 올랐다. 당시 돈이 없어 왕복 비행기표만 끊어 출전했다. 호텔에서 묵던 다른 팀들과 달리 10여일 동안 경기장 라커룸에서 잠자고 컵라면과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래며 올린 값진 결과였다.
"상처받고 소외되기 쉬운 장애인들에게 축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줍니다. 또 서로 손발을 맞추며 뛰다보면 더불어 사는 삶의 이치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됩니다."
타슈켄트에 사는 장애인들은 세빈치팀의 시합이 있는 날이면 경기장으로 대거 몰려 온다. 말 대신 깃발을 흔들고 열광적인 손짓으로 응원하다 보면 그라운드의 장애인 선수들과 자연스럽게 한 마음이 된다. 경기에서 아깝게 진 날은 운동장에서 선수·응원단이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쏟기도 한다.
축구는 그동안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던 장애인들이 마음을 열고 바깥 세상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농아인들은 봉사단체를 만들어 자신들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시각장애인을 한달에 한번씩 방문, 이발·세탁을 해주는 한편 장례식 등을 찾아가 돕고 있다. 노인들만 사는 집에 가 힘든 농사일을 거들기도 한다.
프 로축구 팀을 운영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기숙사는 물론 전용버스마저 없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선수들은 각자의 집과 일터에서 버스·지하철을 타고 경기장으로 나온다.
이목사는 "경기에서 승리한 날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지만 게임을 진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처량하다"며 "25인승 버스 하나를 구입해 선수들이 단체로 경기장을 오갈 수 있게 해주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목사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간 것은 1997년 3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젊었을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보자"며 전주에서 약국을 하던 부인(이미라·36)과 딸(하늘·4)·아들(영광·2)을 이끌고 비행기를 탔다. 집을 사기당해 거리에 내몰릴 위기를 겪기도 하고 애써 구입한 중고차를 이틀 만에 도난당하는 등 갖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타슈켄트에 장애인교회를 세워 목사로 활동하면서 30여만명에 이르는 농아인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이슬람 국가인 이 나라에서 장애인들은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들'로 취급당하고 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들을 위해 수화 책을 만들어 보급 중이다. 또 자립·자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남자들에게 판금·도색을, 여자들에게는 미용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취업을 알선하고 있다.
"왜 먼 남의 나라까지 와 굳이 장애인을 챙기느냐"고 주변의 오해도 많이 받는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이라는 말로 설명을 대신하곤 한다.
원광대 물리학과 재학 시절 수화동아리인 '손짓 사랑회'를 만들기도 한 이목사는 어릴 때부터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전북 남원시내에 있던 고향 집 근처에 고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살던 농아·지체장애아 등과 어울리면서 '왜 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이유로 나는 다리가 있을까'같은 물음을 내 자신에게 던지곤 했었지요." 고등학생 시절에는 집안의 어른들을 따라 소록도를 방문하고는 "여기야말로 나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실제로 대학을 졸업한 뒤 소록도에 들어가 2년 동안 머물며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당시 사람들이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어 주지 않자 "나를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여겨 차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다시 완전히 자라는 데 6개월씩 걸리는 눈썹을 세차례나 깎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 안식 휴가를 받아 식구들을 데리고 전주를 찾은 이목사는 "이번 월드컵 축구 때 우즈베키스탄의 농아 축구선수들을 데려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멋진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장대석·사진=양광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