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없는 교류와 협력으로 통일을 이룬 독일

글쓴이 : 활산 날짜 : 2015-07-07 (화) 23:26 조회 : 240
 
 
1989년 가을, 동독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자 당국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여행자유화 정책을 내놓기는 했으나 실상은 여권발급기간 단축 이외에 별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이를 발표하는 TV 기자회견장에서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국경이 개방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를 “새로운 여권발급정책이 언제부터입니까?”로 잘못 알아들은 동독의 정치국원은 “지체 없이, 즉시”(Sofort, unverzuglich)라고 발표해버렸다. 

 이 단순한 헤프닝은 TV를 통해 동독 전역으로 방송되었고, 동독 주민들은 그 즉시 국경으로 달려갔다. 국경에 몰려든 수많은 주민들을 막기 위해 동독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초소의 지휘관은 결국 국경의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소식을 들은 서베를린의 서독인들은 망치와 곡괭이, 그리고 포크레인까지 동원하여 베를린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반세기 이상 독일을 분단시키고, 동독을 탈출하려던 수많은 동독 주민들을 희생시킨 장벽은 하룻밤 만에 무너졌다.

 이 극적이고 동화 같은 이야기는 우연이 아니며,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각고의 노력의 결과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동독 주민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버렸으며, 서독체제를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통일 당시 서독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고, 선진 민주주의체제와 투명한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독 주민들이 서독을 신뢰한 보다 중요한 이유는 분단 전 기간에 걸쳐 서독이 동독 주민들을 배려하는 정책을 시행했다는 점이다. 서독은 동독 주민들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정책이라면 조건을 달지 않고 시행했다. 프라이카우프로 명명된 비밀사업은 1963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1989년까지 3만 3,755명의 동독 정치범을 서독으로 이주시켰으며, 34억 6,400만 마르크(약 15억 달러) 규모의 대가를 동독에 지급했다. 동독 반체제 인사 1명을 데려 오기 위해 서독은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의 5배에 달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1975년부터 통일 직전까지 서독은 공식, 비공식 형태로 매년 52억 DM(약 23억 달러) 규모의 물품을 동독으로 이전했다. 서독 정부의 동독에 대한 공식적 재정지원 이외의 비공식 지원은 연 평균 34억 6,000만 DM으로 전체의 2/3를 넘었다. 동독에 대한 비공식 지원은 서독인이 동독 방문 시 제공한 금품(연 10억 DM), 동독의 친지들에게 발송한 소포물품(연 7억 5천만 DM), 서독교회의 동독교회 지원(연 8,500만 DM) 등을 포함하고 있다. 서독의 정부와 민간은 동독 주민을 위한 정책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했으며, 서독에 대한 동독 주민의 신뢰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