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의 광야생활 - 38년된 병자 - 38선의 한반도

글쓴이 : 활산 날짜 : 2015-05-18 (월) 09:45 조회 : 784
 
예루살렘성에 들어가는 문이 네 개가 있었습니다. 각 문마다 역할이 있는데 본문에 나오는 양문은 제사에 사용하는 양을 데리고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양문 옆에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트’ 즉 ‘집’이라는 단어와 ‘헤세드’ ‘은혜’라는 단어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로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양문 옆에 있는 연못을 ‘베데스다’ ‘은혜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연못은 가끔 한 번씩 물이 끓어올랐습니다.

연못이 온천과 연결이 되어 뜨거운 물이 한 번씩 솟구쳐 올랐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끓어오르게 할 때 가장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연못을 ‘베데스다’ 즉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는 행각이 다섯 개가 있었고 그 행각 안에는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행각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이 움직일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중환자들입니다. 그들이 베데스다 연못의 주변에 누워 있는 것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 낫기 위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의 집’이라고 하는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 모여 자기에게 은혜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데스다라는 ‘은혜의 집’과 그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누워있는 병자들의 상황은 매우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은혜를 입기를 원하지만 그 은혜는 다른 사람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서 얻는 은혜입니다. 남의 눈에서 실패와 좌절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얻은 은혜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은혜의 집’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다른 서로를 경계하고 긴장하는 분위기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과 그 주위에 누워있는 병자들의 상황은 오늘의 우리의 삶의 자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전쟁터와 같은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정글의 법칙처럼 강하고 빠른 사람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행복을 말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은혜의 세계, 행복의 세계를 말하지만 항상 그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지으며 삽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 주변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명절의 기쁨과 축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명절에 외롭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병자들 가운데 38년 동안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만나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 누워있는 병자 가운데 38년 된 병자는 가장 중한 병자였습니다.

그는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 있는 모든 병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시는 과정을 통해 그곳에 누워있는 모든 병자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오늘의 삶을 살아가면서 상처와 절망감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 가셔서 고통 속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만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는 기독교의 진리는 내가 하나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은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찾아 나아간 것이 아니라 은혜가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이라면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베데스다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시기 위해 그를 향해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참으로 엉뚱한 질문입니다. 오해하면 조롱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38년 동안 거동을 하지 못하고 누워있지만 그래도 나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어서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데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니 황당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는 38년 된 병자에게 이 질문을 던지신 것은 그의 가슴이 동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38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병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베데스다에 누워있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눈에는 희망의 빛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가슴은 낫고자 하는 열망으로 동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예수님의 물음에는 ‘이 베데스다의 물이 움직여야 낫는 것이 아니고, 네 심령의 물이 갈망함으로 요동쳐야 한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간절함입니다. 열망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은 38년 된 병자의 굳어져 있는 마음을 휘젓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라고 질문하신 것은 질병의 장벽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가고 싶은 간절함이 네 마음에 요동치고 있느냐? 열망이 있느냐? 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기적은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아니라 38년 된 병자의 심령이 믿음 안에서 요동칠 때 일어났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과 능력은 환경이 아닌 그 환경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 믿음의 열망으로 강하게 요동칠 때 일어납니다. 나의 삶, 가정, 직장, 교회 안에 놓여 있는 장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장벽을 넘어 진정한 복을 만들기 위한 간절함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아닌 우리의 가슴이 하나님을 향해 요동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품는 간절함과 열망은 우리 앞에 놓인 장벽을 넘어갈 수 있는 힘입니다. 그 열망과 간절함이 있을 때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와 변화는 시작됩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내가 낫기를 원하지만 나를 동하는 물에 넣어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라고 상황과 타인을 원망하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도전의 말씀을 주십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일어나 걸어가라’하시면 될 텐데 ‘네 자리를 들고’라고 말씁하십니다. 여기에서 ‘네 자리를 들고’라는 말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38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절망했던 자리,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남을 원망했던 자리, 나보다 먼저 들어갔다고 불평하며 저주했던 자리,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자포자기 했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며 지금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지 않으면 절대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습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았던 시간과 9절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는 말에서 ‘곧’이라는 말이 매우 대조가 됩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38년이라는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던 기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 광야로 되돌아와 모두가 죽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 38년입니다

. 38년의 광야생활은 가나안을 향하는 것 같았지만 원망과 불평의 시간이었고 불순종의 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해 일어난 시간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며 탄식하고 원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불순종의 1세대가 38년의 광야 생활에서 죽고 새로운 2세대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요단강을 건너는 모습에서 가나안은 활짝 열려졌습니다.

자신의 방식과 생각 속에서 고통과 갈등의 38년을 보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곧’ 그 고통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난을 상징했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해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네 자리’가 무엇일까요?

바램만 가지고 있을 뿐 게으름과 원망과 탄식이 배어있는 저와 여러분의 자리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나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의 믿음으로 응답하며 ‘곧’ 자리를 들고 일어나 은혜의 세계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8년의 광야생활 - 38년된 병자 - 38선의 한반도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