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진짜 문둥이
청년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학생들은 이웃 마을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이야기를 좀더 들으려고 우리 마을에 찾아오는 청년들이 생겼다.
어느 주일 오후, 청년예배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다.
몸집이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 한 사람이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신도 벗지 않은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는 앉아있던 청년들을 훑어 보더니 한 청년의 멱살을 움켜쥐고서는
한 마디 말없이 그 빈약한 체격의 청년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마비된 듯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두 사람의 뒤를 쫓아나갔을 때까지도 예배당의 두 문짝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청년이 더 맞지 않게 말리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자식을 때리는 이런 거친 폭력을 지겹도록 많이 보아 왔다.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을 때 그 남자의 주먹이 날아들었고 나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멍한 정신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나의 행동에 놀라고 자신의 주먹이 내게 명중한 것에 놀란 탓인지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노여움으로 이글거렸다.
"내 자식이 문둥이들과 어울리다니, 절대 안될 말이지!
저 놈은 문둥이가 아니야. 내가 왜 이런 더러운 곳에서 저 자식을 찾아다녀야 하냐구!"
그는 고약하게 내뱉었다.
나는 내 검정색 단벌 양복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상처가 약간 났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여기 문둥이가 어디 있습니까? 이 마을에 더러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당신이야말로 문둥이입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까 그의 주먹이 내 얼굴에 명중한 것처럼 내 말 또한 그의 마음에 명중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무말 없이 돌아서더니 아들을 밀쳐내고 돌아가버렸다.
그제서야 그의 주먹이 다시 날아올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식은 땀이 흘렀다.
그가 돌아가고 난 후에야 나는 청년들은 우리가 한 말을 모두 들었다.
이제는 예배를 마저 드리기 위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숙인채 집을 향해 무거운 발검음을 돌렸다.
나는 집에 돌아와 글을 쓰면서 낮의 일을 애써 잊으려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다시 올 것이다.
나는 그가 난폭하게 굴 것이 무서워서 책상 뒤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가 정말 찾아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정말 그가 왔다. 밤 11시가 지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몽둥이를 보고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며 떨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앙갚음을 하러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몽둥이를 문 옆 기둥에 기대어 놓고 신을 벗고 들어왔다.
"목사님, 낮에는 죄송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방바닥만 내려다 보면서 침묵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제가 문둥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힘이 장사 같은 그 남자가 왜소한 내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는 그제서야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부모님은 문둥병자들이었다. 그가 태어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단 한 가지 방법은 가능한 빨리 아이를 건강한 가정으로 입양시킨 것이었다.
아이는 자식이 없는 어느 가정에 아무도 모르게 입양이 되었다.
그들은 친자식처럼 아이를 길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싸우다가 '줏어다 키운 애'라고 놀리는 소리를 들은 아이는
울면서 부모님께 달려갔다. 부모님은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자신도 문둥병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그러면서 문둥병과 관련된 것은 무조건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미워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집을 떠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도시로 갔다.
그러나 문둥병은 벗을 수 없는 굴레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실제로 발병한 것도 아닌데도 그는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아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직업상의 이유로 영호근처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우리 마을 사람들과 싸웠다.
그는 이웃들을 부추겨 우리 마을 사람들을 증오하며 대적하게 만들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을 볼 때마다 돌을 던져 쫓아버리기도 했다.
문둥병자 부모를 가진 아이들의 심정을 그토록 잘 알면서!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의 운명과 싸우고 있었다.
겉에 드러나는 문둥병의 표시는 없었지만 속마음은 친부모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비밀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찢기워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문둥병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우리 마을에 갔다는 말을 듣게 되자 이성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저녁 무렵에는 낮에 벌어진 일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마침내 아내에게 마음을 털어놓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호에 있는 목사를 찾아가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준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목사님, 정말 불안합니다. 이제 우리 가정을 제 과거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식구를 따돌리고 자식들도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면 어떡합니까?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전부 제 잘못입니다."
"영호 사람들은 형제님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우리 자식들의 장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지요.
우리는 한마음으로 살고 있고 바깥 사람들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업보인 문둥병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형제님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기를 기도하거나
우리가 다시 건강하고 아름다워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문둥병자라는 운명을 짊어진 우리와 화해하신 후로는 많은 것이 변했지요.
형제님도 형제님의 삶과 화해하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도와주실 겁니다."
그의 마음에서 무거운 돌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아들과 함께 우리 교회 청년들을 찾아왔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문둥병자들과의 싸움을 그치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쏟아부어 주시는 평화를 발견해 나가기 시작했다.
19.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청소부 아주머니와 기적에 대한 설교
우리는 뼛속 깊이까지 피곤했다.
눈꺼풀은 무거웠고 주변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노곤했다.
독일에서 온 친구와 나는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의 대기실 복판에 있는
긴 의자 구석에 비좁게 끼어 앉아 있었다.
버스가 출발할 때마다 소음은 더 심해졌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소지품을 챙겨 들고는 버스를 타러 우르르 몰려갔다.
대기실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면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다가
잠시 후에는 새로 온 사람들로 다시 북적거렸다.
친구와 나는 전혀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난 주 내내 이 모임 저 모임을 돌아다녔다.
성경 공부 모임과 청년부 모임, 공장에서 예배드리는 청년들의 모임에서부터 산에 있는 기도원까지,
그리고 새벽예배부터 저녁예배에 이르기까지 쉴새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우리의 주제는 언제나 영호의 양로원 설립 계획으로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순례자 같았다. 몇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발로 뛰어다니고서는 냄새 나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공기조절기가 설치되어 있는 고급 리무진을 타기도 했다.
우리는 극에서 극으로 옮겨 다녔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초대로 값비싼 호텔 뷔페에 가기도 하고
길거리의 작은 식당에서 서둘러 국수를 먹기도 했다.
또 유럽의 성당만큼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가 하면
광주에 있는 작은 이발소의 한구석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우리가 이런저런 걱정거리에 눌려 기진맥진해서 앉아 있을 때
누군가 우리를 옆으로 밀치는 사람이 있었다. 청소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앞에 팽개쳐 놓은 채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웠다.
연기 너머로 수건을 두른 머리와 주름진 이마, 상처 자국이 있는 두툼한 뺨이 보였다.
이가 몇 개 빠져 있었으며 코는 납작했다.
아주머니는 나와 내 독일 친구를 위아래로 유심히 훑어 보시더니 내게 웃어보였다.
아주머니의 나이는 얼른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친구가 갑자기 인사를 했다.
"워매, 이 사람 한국말 허벌나게 잘 허네잉!"
아주머니가 얼른 인사를 받았다. 외국인이 한국말로 인사하는 것이 신기해서였을까?
대화는 쉽게 이어졌다. 우리는 손짓 발짓을 하거나 내가 통역을 해가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산업재해로 세상을 떴다.
그때부터 아주머니는 터미널 청소부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왔다.
식구들은 터미널 근처에 있는 방 한 칸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는 아주머니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쉬는 시간이었다.
아주머니는 터미널의 넓은 공간을 이리저리 청소하러 다니느라 피곤한 다리를 쉬고 있었다.
나는 아주머니가 곧 우리의 직업을 물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묻지는 않아도 돌려서라도 물어보겠지. 하기는 물으면 안될 이유는 없지.
나는 아주머니가 묻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아주머니는
내가 작은 시골 교회의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는 불교신자여요."
아주머니가 말했다.
"근디 절에 안 간지도 오래 됐어요. 초파일날 부모님 따라 갔던 것이 마지막이라잉."
아주머니가 살던 집 지하에 교회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저녁에 퇴근할 때 지하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소리를 자주 들었다.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감히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교회 사람들이 무얼 믿고 있는지 아시냐고 물었다.
"예수 믿는다는 건 알지라. 그리고 그 목사님이 아픈 사람한테 손 딱 엉그믄 싹 나서분다드만요.
그래서 한번 가보고 싶기는 헌디. 내가 다리 땀시 고생을 많이 혀서요. 한번 가보믄 어쩌까잉?"
아주머니가 거리낌없이 물었다. 나는 그 말을 친구에게 통역해 주었다.
우리는 어이가 없어서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목사가 기적의 치료자라고? 그것은 목사 본연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기적적으로 병 고치는 일을 기독교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머니에게 더 이상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영호행 버스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에 탄 후에 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도 보았지? 기독교 신앙에서 아주머니가 희망을 거는 것은 기적적인 병고침이라구.
아주머니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기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군.
영호 식구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야겠어.
자네가 이런 설교를 한 번 했으면 하는데, 내일 예배 시간이 어떨까?"
우리는 밤늦도록 설교문을 작성했고, 나는 독일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겼다.
우리 교인들은 이 설교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영호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4장 46절에서 53절까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본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에 있는 가나로 오시는 길입니다.
가나는 헤롯 대왕의 아들인 로마 왕 헤롯 안티파스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나의 한 혼인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 게네사렛 호숫가에 있는 도시 가버나움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왕의 신하가 한 명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중한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소문에 듣던 예수님이 가나에 오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가나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 자기 집에 와서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떤지 직접 겪어보셨기 때문에
여기에서 "너"라고 하지 않고 "너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임을 증명해 줄 만한 표적과 기사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증명이 안된다고 판단하면 메시아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왕의 신하에게는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메시아든지 아니든지 아들만 구해주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같이 가주실 것을 또한번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같이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했는데 실제로 해주지는 않고 말만 하면 얼마나 실망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집에 가서 아들이 실제로 건강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모두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을 정한다면 '갈릴리에서 일어난 기적적인 치유'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건 아주 옛날 얘기야. 요즘은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어'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왜 요즘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
내 아이가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내가 더 쉽게 믿을텐데'하고 말씀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단정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어떤 사람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을까요?
제가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막이 어떤 곳인지 아시지요? 어떤 사람이 사막에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몇 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물도 먹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난 터라 그의 혀는 입천장에 딱 달라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지평선 너머에 보이는 저것은 무엇일까?
혹시 물이 아닐까?' 그의 마음은 그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그를 가로막습니다. 바로 그의 이성입니다.
그의 이성은 계속 그에게 말합니다. '저기 저 은빛나는 띠는 물이 아니라 신기루야.
그러니까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 그는 이성의 판단에 따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사막에 서 있는 이 사람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없고 하나님도 없으며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향을 돌리고 맙니다.
다른 예를 또 들겠습니다.
창밖에 월출산을 한번 보십시오. 누군가 그 정상에 올라가려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길에 서 있는 안내표지판들은 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만 보아서는 어느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길은 끝까지 보이지 않고 봉우리 뒤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침내 그는 한 길을 선택해서 서둘러 출발합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망설이기 시작합니다.
그 길에는 자갈이 너무 많고 경사가 급합니다.
그는 멈추어서서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마침내 돌아섭니다.
그러면 다른 길은 좀더 쉬울까요?
그러나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매번 망설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어느 길로 끝까지 가야 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믿는지 보면서 그 사람들을 따라가고 싶어합니다.
믿음의 길은 그들에게 너무나 어렵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함께 가주실 텐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광야에 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막에서 목말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상에 올라가는 길을 찾기가 어려워서 산기슭에 서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며 우리가 정상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삶과 죽음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무엇보다 먼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들이 죽느냐 사느냐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아버지가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믿는지에 대해 언급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우리 예수님을 찾읍시다! 예수님을 신뢰합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을 찾아가십시오!
오늘 말씀에서는 아픈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먹을 것을 찾고 일을 찾고 보호와 사랑을 찾고 신을 찾습니다.
성경은 "찾으면 찾을것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경험을 돌이켜볼 때 우리가 찾는 것 대부분은
한낱 동경으로 끝날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갈릴리에 사는 이 왕의 신하와 그 아픈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여,
하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알리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말을 들으며 많은 소식과 광고와 약속들을 듣습니다.
우리의 귀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앞에서 눈은 감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귀를 뚫고 들어옵니다.
말씀은 항상 기적보다 앞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말씀은 예수님이 왕의 신하에게 주신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은 지금 볼 수 없지만 그 말씀은 오늘도 성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은 효력을 잃지 않았고 아직도 계속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병든 아이의 아버지는 내리쬐는 뜨거운 볕을 뚫고 30킬로미터를 달려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가나'는 '갈대'라는 뜻입니다. 가나로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그가 붙든 마지막 지푸라기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기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얻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우리의 이성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가슴으로 거부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보다 다른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께 강한 거부감을 느낄 때 우리는 차라리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막에서 길잃은 사람의 예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지평선 너머 보이는 것이 물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증으로 목구멍이 타오르는데도 거기에서 몸을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는 눈 앞에 구원을 두고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몸을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간다면 우리는 결코 삶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사막의 죽음과 같습니다.
월출산에 올라가려는 사람의 예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가는 길마다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믿음 적은 것을 도와주소서!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에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집에 와주십사는 신하의 간청을 예수님이 거절하고 혼자 돌려보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참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아닌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왕의 신하나 우리에게 있는지가 드러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박한 상황에 빠져서 좌절하고 있는 한 인간을 만나 주셨고,
그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그때까지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기보다는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 신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이 메시아, 곧 기적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언제나 기적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그 메시아에게서 등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신뢰한다면 과연 그의 문제가 풀릴까요?
그의 믿음은 그의 시야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의 만남에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요?
그의 믿음은 과연 그의 고민을 해결해줄까요?
그의 믿음은 눈으로 결과를 직접 볼 때까지 지속되고 있습니까?
그는 예수님 안에 계신 누군가를 깨닫고 있습니까?
우리도 왕의 신하처럼 예수님의 즉각적인 도움을 바랄 때가 많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예수님은 말뿐인 분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뢰합시다!
오늘 말씀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값싼 말에 속았다고 생각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러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말씀은 바로 왕의 신하가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뜻입니다.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온전히 말씀 하나에만 의지하려면 불신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간의 말과 관련된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도 많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그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세계와 삶 가운데서 그와 똑같은 능력의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시험해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왕의 신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현실을 변화시키는 '행동'이었습니다.
아이는 정말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빈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행복한 결말이 아닙니까? 무엇이 이 이야기를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 갔습니까?
여기에는 '기적의 치유자가 사경을 헤매던 아이를 살리다'라는 식의 제목을 붙이면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유발된 호기심은 하루만 지나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예수가 한 아버지와 그의 가족 모두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었다'라는 제목,
불꽃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를 제목을 붙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죽어가는 아이의 병을 고치는 것은 일시적인 구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이와 그의 가족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이러한 믿음의 기적은 예수님이 사시던 때보다 지금 더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왜 그 말을 믿어야 하지?" 하고 묻습니다.
왕의 신하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사렛 출신의 목수 예수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에 담긴 권위를 알고 있는 그는 목수의 말을 왕의 말처럼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실재를 믿는 사람의 삶은 이미 변화받은 삶입니다.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덧붙이는 글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 열아홉 편의 이야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저 그곳에서 놀라운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제가 느낀 감정을 몇 마디 덧붙일 수 있을 뿐입니다.
영호에 사는 사람들이 왜 놀라운 사람들이냐구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성자는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한국 사람이든 독일 사람이든, 문둥병 환자이든 건강하든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기나 질투, 분노나 다툼이나 불화 등으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영호와 그 이웃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꼭 달라붙어 있듯이
하나님께 꼭 매달려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문둥병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육체적으로도 살아남기 위한 전쟁의 복판에서도
평화를 누린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문둥병을 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둥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좀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난 점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김요석 목사가 최근에 보내온 편지의 몇 구절로 이 글을 맺고자 합니다.
양로원이 거의 완공되었네.
우리 식구들은 모두 주님을 찬양하고 있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건물을 세우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독일에 안부를 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