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하다 회심한 선교사, 北 농아축구팀 감독되기까지

글쓴이 : 손짓사랑 날짜 : 2015-04-30 (목) 10:28 조회 : 741
 
염불하다 회심한 선교사, 北 농아축구팀 감독되기까지
<하나님이 보낸 사람> 저자 이민교 선교사 인터뷰
김민정(atcenjin@newsmission.com) l 등록일:2015-04-17 16:29:33 l 수정일:2015-04-21 17:21:46
 
 
한센병 환자를 돕기 위해 소록도로 들어갔던 ‘뼛속까지 불교 신자’ 이민교 선교사. 소록도 법당에서 목탁을 치다가 자신도 모르게 찬송가를 흥얼거렸고, 그 곡조는 방언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하나님께 불려나온(?) 이후 이 선교사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농아인 축구팀 감독으로 활동했다.

지금 그의 활동 무대는 북한이다. 2013년 북한농아축구팀 감독을 맡게 된 것. 그가 최근 펴낸 <하나님이 보낸 사람>에는 이러한 그의 독특한 신앙 여정이 담겨 있다. 그는 “남북의 장애인들이 통일의 물꼬를 트는 통로로 쓰임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이야기한다.

소록도에서 극적으로 회심…농아인 축구감독이 되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민교 선교사는 법당에서 목탁을 두드리던 사람이었다. 독실한 원불교 가정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고, 자타공인 교무(敎務)가 될 재목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누나의 권유로 소록도를 방문한 후, 한센병 환자들을 돕겠다는 뜻을 품고 그곳에 정착했다.
▲17일 기자들과 만난 이민교 선교사. 2010년 <복음에 빚진 사람>을 펴내기도 했다.ⓒ뉴스미션

소록도에 머문 지 7년, 법당에서 염불을 하던 중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찬송가.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소록도 장례식에서 들었던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의 가사였다. 찬송가는 이내 뜻 모를 방언으로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뼛속까지 불교 신자였던 그가 하나님께 나오게 된 극적인 순간이었다.

“소록도 사람들에게 부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갔는데, 오히려 그들이 내게 예수의 삶을 전염시킨 거죠. 환자들은 불도를 전하는 나를 향해 불쌍하다고 했어요. 예수 믿으면 행복할 거라고…. 결국 그렇게 됐고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그는 가족들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가 농아인들을 섬겼다. 농아인들과 함께할 방법을 고민하다 생각해 낸 축구. 공으로 하나가 되며 놀다 보니 축구감독까지 하게 됐다. 3년 만에 농아인 축구 국가대표팀을 구성해 30여 명의 선수를 길러냈고, 2000년 농아인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그는 운동선수 출신도 아닌 비전문가였고, 현지 농아인들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 인식으로 인해 삶의 희망도 없이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축구로 함께 땀 흘리며 울고 웃은 시간들이 일궈낸 기적과도 같은 쾌거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농아인축구팀을 만든 건 그가 최초였다.

“이슬람권 나라에서는 장애인을 ‘신이 버린 사람’으로 인식해요.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들도 흔치 않죠. 무슬림 사회에서 버림받은 장애인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운동하면서 신앙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믿는 농아인들이 하나둘 생겨났죠.”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동안 2차례 추방을 당하면서 잠시 좌절할 뻔하기도 했지만, 농아인들을 향한 애정과 신념이 남달랐던 그는 2005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가 농아인 축구팀을 맡았다. 2008년 농아인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땄고 지금까지 팀을 이끌고 있다.

그가 축구만 한 것은 아니다. 일자리를 얻기 힘든 농아인들에게 일터를 제공했고, 이들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예배하며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도록 교회와 사업체를 병행하는 개념의 일터교회들을 세웠다.

“남북의 장애인들이 통일의 물꼬 트는 통로 되길”

이 선교사가 북한으로 눈을 돌리게 된 건 지난 2012년 12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장애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했을 때였다. 비정부기구(NGO)인 푸른나무 대외협력본부장 자격으로 행사에 참여했던 그는 처음 보는 북한 장애인들의 모습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울분을 느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뉴스미션

“소록도에서 회심한 이후 또 한 번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하심을 느낀 순간이었어요. 내가 태어난 조국, 대한민국이 장애인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허리 신경이 마비된 땅덩어리라는…. 그날 밤 북한을 품겠다 결심하고 농아축구팀을 해보겠다고 제안했어요. 마침 북한에서도 관심을 보였고요.”

이 선교사는 2013년 10월 18일 평양에서 조선장애자보호연맹 장애인체육협회 관계자들과 만나 북한 최초의 농아인 축구팀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2016년까지 감독직을 맡게 됐다.

지난해 12월에는 호주 농아축구팀과 친선경기도 가졌다. 35년 역사를 가진 호주팀과의 경기에서 1:4로 패하긴 했지만, 이 선교사는 이를 계기로 농아인 축구를 통한 통일 사역이 본격화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북한에 약 175만 명의 장애인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요. 저는 대한민국 통일의 물꼬를 트는 데 남북의 장애인들이 귀한 역할을 하리라 믿습니다. 선수들에게도 우리가 남북통일의 주역이 되자고 얘기했어요.”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그리고 북한까지 넘나들며 20년 가까이 농아인 축구팀 감독으로 살고 있는 이 선교사. 통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며 5가지를 거듭 강조했다.

“매월 1일 통일금식, 한 달에 한 번 통일예배. 통일성경(북한어 성경 읽어보기), 통일저금통으로 통일자금 모으기, 통일선교사 양성에 한국교회가 적극 동참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정치적 의도를 떠나서, 민간인들이 순수하게 통일을 준비하고 연습할 때 통일을 앞당길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