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밖에 갈 사람이 없다.”
모두 나를 지켜봤다. 뒷자리에 쭈그리고 있던 나는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이 노회의 막둥이 목사입니다. 여순사건 직후 이 노회를 찾은 것은 지역민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수에 온 지 1년 하고 아홉 달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나를 놓아주고 노회가 허락한다면 구례군 여덟 교회의 담임목사로 가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는 만삭이 된 아내를 생각했다. 노회는 나의 구례읍교회(현 구례중앙교회) 담임목사 위임과 구례군 내 7개 교회 당회장직을 결의했다. 구례읍교회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창립된 교회가 아니라 1894년 고형표라는 분이 미국을 유람하다가 복음을 듣고 예배처소를 정하고 시작했다. 5대 담임이었던 양용환 목사는 3·1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사했다. 그런데 6·25전쟁에 또 한번 담임목사를 잃었다. 7대 이선용 목사가 빨치산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던 것이다.
구례읍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7개 교회는 전도사들이 돌보고 있었는데 전쟁 이전에 빨치산에 모두 학살당했다. 그래서 구례읍교회 담임목사가 이들 7개 교회까지 돌보고 있었다. 이선용 목사가 죽자 아무도 이 지역 교회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노회 회원은 모두 나이 든 목사님이었고 20대 젊은 목사는 나와 몇 명 있기는 했으나 모두 가난한 마을과 섬의 목회자였다. 한 교회 안에서 두 목사가 일하던 곳은 여수교회밖에 없었고 내가 지목을 받은 것이다.
나는 결단했다. 반야봉과 노고단, 섬진강의 아름다운 산천이 시체 더미가 됐다고 해서 8만 구례군민과 영혼들마저 버려둘 수는 없었다. 교회 부임은 1951년 7월이었다. 첫날밤은 충격적이었다. 목사관 앞에서 토벌대와 빨치산의 전투가 벌어졌다. 박격포와 총알이 집 앞 감나무 밭 위로 불꽃처럼 쏟아졌다.
8월엔 내 평생 잊지 못할 장례식을 인도했다. 빨치산 ‘산(山) 사람’ 시체가 경찰서 정문에 일렬로 뉘여 있었다. 끔찍한 시체를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방치했다. 경찰서 뒤에도 시체 다섯 구가 있었다. 광목천을 덮은 시체였고 토벌 경찰대의 희생자였다. 그 중 세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경찰서장은 나에게 장례식을 부탁했다. 나는 갑자기 산 사람 시체가 생각났다. 거적이라도 덮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장례식 조건을 제시했다.
“저는 원수의 생명이라도 긍휼히 여겨야 하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은 저 산 사람과 토벌대를 함께 치르도록 합시다.”
서장은 내 뜻은 알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다음 날 서장은 나의 공동 장례식 요구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오전에 희생 경찰들을 합동 장례하고 오후엔 목사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나는 망설였지만 이를 받아들였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구례읍에 온 목사가 경찰에 명령해 빨치산 시체를 고이 덮어주었다는 얘기가 산동네까지 퍼졌다. 희생 경찰 장례를 오전에 한다는 소식으로 온 고을이 떠들썩했다. 산 사람 시체 일곱의 가족 가운데 다섯 명의 식구들이 나를 찾아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사망자 중 진짜 인민군 빨치산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두 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손양원 목사님을 생각했다. 가장 아리고 슬펐던 지리산 밑에서의 첫 장례식은 이렇게 나의 민족관과 인간관의 바탕이 됐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조동진 목사가 1951년 7월 부임한 구례읍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 직접 작성한 설교문.